■ 정업원<中>

 

살아생전에는 고향 같았고

슬플 땐 함께 울어주었으며

죽어선 왕생 빌어준 세 아내

연산군이 전국에서 뽑아 올린 여자의 수는 1000여 명에 육박했다. 그 중 역사서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여인을 꼽으라면 연산군의 정비 신씨, ‘장녹수’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숙용 장씨, 그리고 후일 정업원 주지가 된 숙의 곽씨 등을 들 수 있다.

<조선불교통사>에는 왕비 신씨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왕비 전하께서 숙세로부터 훈습된 종자의 선근을 발휘하여 주상전하의 총명한 슬기가 장구하길 기원하기 위해 해인사 대장경을 8000여 권으로 인쇄하게 하였다.”

남편이 성군이 되길 바랐던 신씨의 발원과 달리 연산군은 악명 높은 폭군이 되었다. 하지만 연산군에게 있어서 신씨는 고향 같은 존재였으며, 진정으로 자기편이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1504년 연산군이 성종 계비인 자순대비를 죽이기 위해 장검을 들고 침전으로 가자, 궁인들이 겁을 먹고 모두 달아났다. 이때 왕비 신씨가 버선발로 쫓아가 남편을 붙잡고 애원하자 연산군은 순한 양처럼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연산군은 강화로 유배를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신씨가 보고 싶다”였다. 신씨는 죽기 전 중종에게 부탁을 해 남편의 곁에 묻혔다.

이에 비해 장녹수는 연산군과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여인이었다. 폐위되기 9일전 연산군은 후궁들을 데리고 연회를 열었다. 이날 그는 직접 풀피리를 불면서 곡조를 불렀다. 비감에 빠진 연산군은 시를 지으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다른 이들은 이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유독 장녹수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역사상 대부분의 요부들이 뛰어난 미인이었던데 반해 장녹수는 전혀 예쁜 여자가 아니었다. 이미 결혼을 해 아이까지 둔 유부녀였으며, 또한 미천한 노비 출신이었다. 하지만 노래와 춤에 능했던 그녀는 뛰어난 예술 감각으로 연산군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숙용이라는 직첩까지 하사받았다.

대부분의 왕실여인들이 불교를 신앙했던 것과 달리 장녹수가 불사를 했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남아있지 않다. 이는 장녹수가 여타의 비빈들과 달리 ‘낙하산을 타고 온 후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장녹수는 왕실의 공통문화였던 ‘불교’를 받아들이기에 여러 가지로 코드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한명의 여인, 숙의 곽씨는 연산군이 동궁 시절 세자빈 최종면접까지 올랐다가 탈락한 인물이다. 원래 왕비나 세자빈 최종간택에서 떨어진 여자는 평생토록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성종은 곽인의 딸을 세자의 후궁으로 삼도록 하였다. 곽씨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숙의에 봉해졌다. 곽씨와 연산군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연산군이 폐위되기 1년 전 숙의 곽씨를 위해 집을 하사하고 곽인에게 벼슬을 내린 것으로 볼 때, 연산군이 무척 아끼던 후궁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곽씨는 연산군이 폐위된 후 정업원 비구니가 되어, 연산군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냈다. 곽씨가 짤막하게나마 역사서에 등장한 것은 후일 그녀가 정업원의 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록에 등장하는 마지막 정업원 주지가 바로 곽씨이다.

한 여인은 살아생전 고향 같은 존재였고, 다른 여인은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이였고, 또 한명의 여인은 죽은 뒤 극락왕생까지 발원해주었으니, 연산군이 여복 하나 만큼은 제대로 터진 게 분명하다.

[불교신문 2886호/2013년 2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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