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유일사찰 관음사

흑산도의 유일사찰 관음사 주지 대지스님은 날마다 고려시대 사찰터인 무심사지를 참배한다. 삼층석탑에 108배를 올리면서 수행자의 삶에 감사하고 정진할 것을 약속하고 회향하는 삶을 발원한다. 지난 12월15일 삼층석탑을 예경하는 대지스님.

다 무너져가는 관음사…신도 ‘0’

비구니 대지스님 원력…‘3년결사’

매일 선착장서 기도하고 탁발하고

3년 만에 전각 1동 겨우 ‘완공’

예불을 마친 이른 새벽, 스님의 손길은 분주하다. 찻물을 연신 끓여 수백명이 마실 솔잎차를 달인다. 부처님 말씀이 새겨진 경전구절을 떼어 코팅한 묶음을 챙기고, 기와불사를 위한 기와와 사인펜도 빠짐없이 꾸린다. 아이들이 좋아라하는 사탕도 한바구니 채워넣고 사람들에게 나눠줄 단주도 충분히 담아둔다. 마지막으로 경전테입 돌리는 녹음기와 목탁을 확인한 스님은, 이 많은 짐을 인력거에 차곡차곡 싣고서 흑산도 선착장으로 향한다. 예순이 훌쩍 넘은 비구니 스님이 무거운 인력거를 끌고 동트는 새벽 흑산고개를 넘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선착장에 닿으면 짐을 풀기도 전에 스님은 팔을 걷어부치고 주변청소를 시작한다.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온갖 쓰레기는 물론 배멀미로 쏟아낸 구토물이며 술병 담배꽁초까지 말끔하게 치운다. 청소를 마치면 선착장을 빙 돌면서 ‘도량석’을 한다. ‘법당불사 모연’을 위한 스님의 ‘탁발’에 처음엔 사람들이 “비구니가 차장사한다”면서 의심하고 비웃음을 보였지만, 스님의 이런 모습이 3년간 지속되자, 흑산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찰 하나 없는 흑산에 부처님도량 하나 조성하려고 무던히 애쓰는 스님의 절실함과 진정성이 통했다. 목탁과 염불소리가 싫다며 민원을 넣는 관광객을 면장이 나서서 설득하는가하면, 무겁고 번거로운 짐은 선착장 가까운 상가에 맡기라며 자전거를 내주는 이웃도 생겼다. 용기가 나지 않아 선착장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스님에게 “한복판으로 와야 사람들이 많이 동참할 것 아니냐”고 부추긴 것도 흑산도 사람들이었다. 주말이면 선착장에 숱하게 불법좌판이 들어서는데, 단속에서도 스님은 예외다. 흑산도에 유일사찰 관음사 주지 대지(大智)스님은 이제 ‘터미널 스님’, ‘자전거 스님’으로 불리면서 흑산에서 스님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가 됐다. 아이들을 유독 사랑하는 대지스님은 아이들이 ‘돼야지 스님’이라고 놀려대도 마냥 웃으며 날마다 사탕과 요구르트, 과자를 나눠줬다.

대지스님은 11년 전 흑산의 빈 절에 살겠다는 도반을 데리고 이곳에 잠깐 들렀었다. 1980년대 초반 출가 이후 줄곧 선방에만 다녔던 스님은 흑산에 도반을 남기고 육지로 돌아와 수행정진을 이어갔다. 4년여가 흘렀을까. 흑산을 떠나겠다는 도반의 소식을 듣고, 이번엔 스님이 “한번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다시 찾았다. 2005년 다 허물어져가는 관음사 부처님은 “왜 이제사 왔느냐”며 대지스님을 반기는 듯 했다. 그렇다고 스님이 법당에서 꿈쩍 않고 살 수만은 없었다. 경남 창원서 태어나 울진 석남사로 출가한 대지스님은 카랑카랑한 경상도 사투리를 거침없이 구사한다. ‘경상도 비구니 스님’이 전라도 서남단에 있는 신안 흑산에서 사람들과 어우러져 산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았으리. 대지스님은 기도정진에만 몰입했다.

날마다 절에서 3km남짓 떨어진 곳에 모셔진 고려시대 사찰 무심사지를 참배하고, 절터에 모셔진 석탑(전남문화재자료 제193호 흑산 무심사지삼층석탑) 앞에서 108배를 올렸다. 석탑 곁에 서 있는 석등을 어루만지면서 “부처님…부처님…” 하고 읊조렸더니 어떤 날엔 석등 안에 둥지를 튼 철새들이 작은 돌틈을 뚫고 나와 퍼드득 날개를 떨며 날아갔다면서, “내 마음을 알아준 부처님”이라며 스님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3년여간 기도와 정진으로 살아온 스님은 붕괴위기에 처한 관음사를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었다. 그 즈음 관음사 인근에 옛 관음사 신도였던 한 할머니가 관음사 몫의 땅을 갖고 있었다며 선뜻 내놓았다. 도량불사를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대지스님이 2008년 처음 선착장에 탁발을 나간 것은 무너져가는 관음사의 내부불사를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었지만, 땅이 생기고 난 뒤 본격적으로 ‘관음사 중창불사’를 시작한 계기가 됐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대지스님은 그렇게 ‘터미널 스님’이 됐다.

대지스님이 그린 흑산도의 풍경

대지스님의 ‘3년 탁발’, 아니 ‘3년 결사’는 스님의 기도원력과 흑산도 사람들의 훈훈한 정으로 어우러져 ‘1차 결실’을 거뒀다. 관음사터에 지난 2011년 요사채 1개동이 건립됐다. 스님이 부처님을 모시고 함께 사는 공간이라, 법당도 겸하고 있다. 적지않은 불사금이 들어갔다. 대지스님은 “내 죽어서 다른 스님 오셔도 살고싶은 도량이 돼야 않겠냐”고 했다.

문제는 법당이다. ‘10평 법당’을 짓는데만 2억여원의 예산이 소요되는데, 대지스님은 “아직 갈 길이 멀다”면서 큰숨을 내쉬었다. 스님은 최근 관음사를 조계종 제22교구본사 대흥사 말사로 등록했다. 흑산의 명산인 칠락산 칠락봉 바로 아래에 있는 절이라, 이름도 칠락사로 바꿀 계획이다. 등록사찰이 아니다보니 수많은 스님들이 오가면서 도량이 청정하게 유지되지 않았던 과거의 사례가 되풀이돼선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지스님의 손은 나무껍질처럼 거칠어졌다. 날마다 풀뽑고 밭농사 짓고 이 산 저 산 다니면서 ‘소나무 갈비’ 뜯느라 ‘농부의 손’이 돼버렸다. 60평생 수행정진으로 도무지 나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고왔던 스님의 얼굴은 흑산의 차디찬 센 바람에 할퀴어 갈라지고 주름졌다. 마을 어른들은 “처음엔 참 고왔던 스님이 폭삭 늙었다”고 했고, 스님은 “불사하니까 몸이 고장납디다”라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어예. 내 몸담고 있는 데가 내 집이니까 사는 동안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야 않겠습니까? 출가했으니 도량청정이 제일 아입니까? 풀뽑고 밭갈고 돌멩이 하나라도 바르게 놓고 부처님을 모셔야지예. 평생 정진하고 수행한 삶을 이렇게 회향하는 것이지예.”

속가 이모님의 출가로 어릴 때부터 ‘이모 스님’을 따랐던 스님은 여동생과 나란히 머리를 깎았다. 동생 스님과 수많은 도반들은 “그토록 힘든 섬에 가서 뭣하러 사서 고생을 하냐”며 말렸지만, 스님은 굽히지 않았다. “기자님, 보이소. 우리절 옆에 군부대도 있고 초등학교도 있고 중학교도 있다 아입니까? 군장병들이 일요일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한다 아이요? 밥이라도 배불리 먹이고 여법한 법당에서 법회도 봐주고 상담도 해주면 참말로 좋을낀데…. 덕 있고 복 있는 스님이 계셨으면 잘 하련만 내가 모자라가….” 스님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관음사에 봉안된 부처님

“흑산도 홍어도 좋지만, 부처님도량 생기면 얼매나 좋겠노…”

 법당불사 도움 ‘절실’

흑산도엔 30여년 전 창건한 유일한 사찰 관음사가 있다. 최근 조계종 제22교구본사 대흥사 말사로 등록했다. 신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년에 한번 부처님오신날 서너명의 할머니가 전부다. 십수년 전만도 신도가 제법 있었다고 한다. 보살계법회를 할 정도였지만, 스님들이 자주 바뀌고 스님들이 절을 떠날 때마다 절살림을 한트럭씩 싣고 갔다는 말도 도민들 사이에 돈다. 흑산도 사람들이 사찰과 스님들에 대한 불신을 갖는 이유다. 도민들은 고스란히 성당과 교회로 옮겨갔다. 흑산이 관광지로 급부상하면서 성당과 교회는 늘어났고, 하나뿐인 사찰 관음사의 존재감은 땅에 떨어졌다.

쉼없이 기도정진하면서 이웃 어른들에게 웃는 얼굴로 먼저 찾아가 어려운 일을 묻고 상의한 비구니 대지스님이 흑산에 정착하면서 흑산도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저 비구니도 조금 살다 가겠지”라고 빈정댔던 마을사람들은 이제 비록 성당을 다니고 하나님을 믿지만 배추와 무, 각종 나물과 해산물을 들고 스님을 찾아온다. 스님 역시 맛난 죽을 싸들고 여든살 아흔살 할머니들이 혼자사는 집을 다니면서 말동무를 해준다. 그렇게 7년여를 살다보니 대지스님은 집집마다 갖고 있는 속사정에 밝다.

“어렵지만 내 혼자는 충분히 살만합니더. 내가 선방 다닐 때부터 매달 10만원씩 보내주는 보살이 있는데 요긴합니더. 올해부터 경로대우를 받아 9만2000원 공과금 지원도 나온다 아입니까. 또 할매들이 가져다주는 찬거리도 큰 도움이 되지예. 더 아프기 전에 법당을 여법하게 지을 수만 있다면 내 할 일은 다 하는긴데…. 자나깨나 그 원력으로 살지예.”

흑산도 관음사 현판

흑산도 관음사 법당 조감도

[불교신문 2877호/ 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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