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길 하

탑은 탑보다

탑 그림자가 더 좋다

그림자도 그냥 그림자가 아니라

물고기떼 집이 돼주는 물 속 그림자가 더 좋다

물 속 그림자도

뭉게구름 몇 장 데리고 노는

늙으신 탑이 더 좋다

아침마다 마당을 쓸어놓고

등불같은 까치밥 쳐다보는

우리 종손같은 탑이 더 좋다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불교신문 자료사진

■ 시 심사평

“번잡 벗어도 ‘결핍’은 없었다”

고은 / 시인

또 묵은 인연으로 <불교신문> 새해의 시를 만나게 되었다. 500인의 응모작 가운데서 나에게 온 92인의 작품들을 읽기를 거듭했다. 우선 소재의 폭이 넓다.

절간 해우소와 노모의 응가에도 시의 시야가 꽂혀 있다. 쓰레기 분리수거와 환경미화원의 미덕에도 가 있다. 찜질방에도 가 있다. 멀리 아프리카 수단에서부터 스페인 그라나다도 지나친다.

물론 <불교신문> 응모이므로 산사나 불교정서에 발걸음을 상습적으로 하는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시조쪽이 저조한 반면 자유시 쪽의 역량은 그야말로 당당한 군웅할거(群雄割據)이다. 자유시의 경우 그 지적인 표현능력의 수준이 놀라울 정도였다.

‘월식’은 착실하다. 어머니의 내실 반지고리에 성장과정의 향수가 밀집한다. ‘호미로 새긴 금성모자’ 역시 농경사회의 한 정경이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사상(事象)을 구현한다. ‘농점 6호’ 역시 벼농사의 첫 사례가 정교한 공감을 자아낸다. 농업적 지성이 여기에 있다. ‘궁극의 시간’은 청각언어의 묘미를 재미나게 살리고 있다. 우리말의 의성어로 궁극의 의미를 포착하는 재치가 있다.

‘탑’은 번잡을 다 벗어나 있다. 그렇다고 결핍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단호하고 단정하다. 참 경지가 엿보인다. 다만 이것과 다른 작품의 수준에 차이가 나서 이것이 의외적이다. ‘노도서신’은 서포 김만중을 통한 강개가 절절한 궁중언사가 묘미를 더한다. 유장하다. ‘둠벙에게 물어봐’는 고향에서의 유년체험이 성숙한 의식에 대해서 근본에의 환원을 일깨운다. 시다운 시다.

‘배꼽이다’는 이만한 현실감각에서의 깊은 자의식은 기성시단에서고 귀중한 현상이다. 하지만 의식의 노출이 감동보다는 충돌하는 기호의 역설에 기울어지고 있다. 이런 나머지 ‘탑’으로 당선작을 삼는다. ‘둠벙…’과 ‘배꼽…’이 아깝다. 내 마음으로는 셋을 한꺼번에 뽑고 싶었다.


■ 시 당선소감

“불교의 진리는 ‘질량불변의 법칙’입니다”

최길하

제게 불경을 풀어놓은 책이 있는데 그것이 고등학교 교과서인 화학, 생물, 물리 등의 책입니다. 공고 화공과를 졸업하고 그것으로 지금까지 밥도 만들고 글도 만들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참 재미없는 책이 전공이었던 화학이었는데 졸업을 하고 어느 날 헌책방에서 일본사람들이 쓴 갈잎만한 크기의 자연과학문고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물리 수학 화학 천문을 세상 이치와 비교하면서 너무 재미있게 풀어놓았더군요.

<화엄경>이 참 심오하고 좋다고 하여 그것만 터득하면 마음에 환한 꽃밭이 한 마지기 생기는 줄 알고 책을 사서 읽어보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그래도 심심하면 바람이 책장 넘기듯 뒤적뒤적하다 덮고 하기를 몇 십 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화학책 내용 중에 ‘질량불변의 법칙’이 바로 <반야심경>과 한통에 붙은 배와 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반야심경> <화엄경>이 엉킨 실 풀리듯 술술 다 풀리는 겁니다.

<법화경> <화엄경>은 자연과학을 은유와 상징으로 세상이치를 말씀하신 자연과학책이었고, 화학 천문 물리 등은 경전에 그려놓은 법계를 수치로 정량계산 할 수 있도록 증명한 경전이었습니다. 가장 큰 발견은 등호(=)입니다. 모든 수학은 좌변과 우변을 평등 즉 균형을 이루게 하라는 것이잖아요. 균형이 되면 정답이고 어느 쪽으로 기울면 오답입니다.

이 세상의 이치인 성주괴멸 이것은 산화와 환원인데 항상 동시에 이루어지며 좌우가 질량불변, 균형을 유지합니다. 요즘 정치사회의 화두가 통합이고 통합의 방법으로 격차를 줄이자는 것인데 층의 높낮이차를 낮추자는 것도 등호(=)의 세상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시조를 쓰고 있습니다. 성을 쌓고 스스로 성에 가두어진 성주와 성 안에 백성이 있는 연방을 바라보면서 소외자가 치고나갈 방편으로 시를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불교신문 2877호/ 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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