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스님의 불교 이삭줍기〈40〉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된 초창기에 중국 사람들이 불교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서진(西晉, 280~316)시대 말기부터 동진(東晋, 317~420)시대 사이에 불교를 도교나 유교의 사상에 비교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일어났는데 이를 ‘격의(格義)불교’라고 말했다.

불교의 교의를 이해, 해석하는데 있어 먼저 도가(道家)사상이나 유가(儒家)사상을 통하여 불교를 이해하는 방법을 썼던 것이나. 이는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먼저 있었던 사상적 토양에다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면서 기존의 사상과 새로운 사상의 유사성을 찾아내어 서로를 이해하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불교의 용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도교의 용어와 유교의 용어로 그 유사성을 찾아 이해하려 하였던 것이다. 특히 노장사상에 의한 불교의 반야사상을 이해하면서 노장에서 말하는 무(無)와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을 서로 연관 지어 무가 공이며 공이 무라고 이해하게 하였던 것이다.

<양고승전>에는 도안(道安, 312~385)이 그의 제자 혜원에게 장자의 의리로 불교를 강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말이 있다. 또 노장사상이 불교의 <방등경>의 내용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유교의 사상을 불교와 일치시켜 이해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불교의 오계(五戒)를 유교의 오상(五常) 같다고 이해하게 했다. 불살생(不殺生)을 인(仁)으로 불투도(不偸盜)를 의(義)로, 불사음(不邪淫)을 예(禮)로, 불망어(不妄語)를 지(智)로, 불음주(不飮酒)를 신(信)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러한 격의불교를 통하여 이루어진 불교이해가 육가칠종(六家七宗)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모두 공(空)과 유(有)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에 두고 본무종(本無宗), 즉색종(卽色宗), 심무종(心無宗), 식함종(識含宗), 환화종(幻化宗), 연회종(緣會宗)의 여섯 가지 이름이 나왔으며, 본무종에서 본무이종(本無異宗)이라는 이름이 또 하나 나와 칠종이 되었다. 격의불교가 4세기 말까지 지속되면서 반야사상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의 성과가 있었다고 불교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격의불교는 불교의 경전을 깊이 이해하는데 있어 어떤 한계를 느끼면서 도가의 사상이나 유가의 사상과 불교를 같은 것으로 보는 오해의 소지를 남겨 격의불교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불교의 교의를 도가나 유가 사상과 동일시한다면 불교의 독립성이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격의불교의 수용을 허락했던 도안마저 만년에는 격의불교가 불교의 근본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고 비판을 가하였다. 이리하여 격의불교에 대한 득실을 논하면서 격의불교의 탈피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중국에 들어와 많은 경전을 번역하고 승조(僧肇, 384~413) 등 우수한 제자들을 배출하고부터 격의의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불교의 교의를 바로 천명하는 독자적인 방법이 새로 일어났다.

특히 승조가 <조론(肇論)>을 지어 반야사상을 새롭게 천명하면서 격의불교에서 내세웠던 본무(本無), 색즉(色卽), 심무(心無)를 척파한 이후로 격의불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론>에서 <부진공론(不眞空論)>의 이치를 설하여 격의불교를 극복, 반야공관에 대한 불교 본래의 참뜻을 설하여 반야사상을 새롭게 완성했다고 평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격의불교시대를 마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불교신문 2874호/ 12월19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