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스님의 백일법문’ 강좌 개최

고우스님이 백일법문을 이야기 하고 있다. 김형주 기자

1967년, 불교 근현대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법회가 열렸다.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하던 성철스님이 해인총림을 설립한데 이어 동안거 기간 100일 동안 대법회를 개최했다. 성철스님은 이 백일법문을 통해 불교가 무엇인지를 대중에게 상세하게 전달했다. 그 백일법문을 다시 듣는 자리가 마련됐다.

문수산 금봉암에 주석하고 있는 원로의원 고우스님을 통해서다. 조계종 중앙신도회(회장 김의정)와 백련불교문화재단(이사장 원택스님)이 주최하고 불교인재원(이사장 엄상호)이 주관하는 ‘성철큰스님 백일법문’은 지난 11일 첫 강의를 시작으로 둘째, 넷째 월요일 오후 7시에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내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총 10회에 걸쳐 열린다. 그 첫 강의를 요약했다.

지금까지 두차례에 걸쳐 백일법문 강의를 한 바 있는데, 이번 강의에 가장 많은 사람이 온 것 같다. 아마도 최근 종단의 현황과 관련해 더욱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아닐까 한다.

나는 백일법문을 직접 듣지 못했다. 당시 다른 사찰에서 동안거를 보냈기 때문이다. 해제 후에 법정스님을 만나 성철스님이 백일법문을 했다는 것을 알고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러던 중 <백일법문> 책을 접하고 너무 반가운 마음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했고, 또 내가 몰랐던 부분도 알게 됐다. 하지만 끝내 아쉬운 점은 큰스님이 말한 것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을텐데, 그것을 알 수 없는 점이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보면 중도(中道)를 이야기하고 있다. 부처님과 과거의 스님, 성철스님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중도’가 아닌가 한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를 바 없이 마음을 낸다)의 가르침도 바로 중도이며, 선사들의 깨우침을 담은 선어록의 내용 하나하나도 모두 중도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표현을 다양하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경전마다 말이 다르고, 스님마다 말이 달라 불교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혼돈하는데, 결국 모든 것은 중도의 가르침으로 압축된다.

그러면 중도란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냥 부처가 된 것이 아니다. 싯달타는 출가 전까지 많은 갈등과 고민을 하며 살았다. 왕자로서 권력을 가지고 이를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출가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그때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이 바로 중도 사상이었다.

중도를 깨닫기 이전에는 항상 ‘나’라는 존재 속에서 무언가를 추구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중심에 놓고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중도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 보자. 십 수년 전의 일이다. 한 섬유공장에서 기계가 고장을 일으켜 멈춰 섰다. 섬유의 특성상 한 시간만 기계가 돌지 않으면, 모든 기계를 버려야 할 판이었다. 급히 모든 기술자들이 동원돼 잘못된 곳을 찾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때 한 직원이 자신이 찾아보겠다며 이곳저곳을 보다가 나사 하나를 조이자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중도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나사 하나지만 모든 기계를 돌리는데 필수적인 것처럼, 모든 생각과 사상을 움직이는 역할을 하는 나사가 바로 중도 사상이다.

‘나’라는 집착에 쌓여있는 우리는 바로 고장난 기계다. 그 기계의 핵심 하나, 나라는 잘못된 생각을 중도로 돌리면 내 인생이 바뀌게 된다. 빈부의 격차, 여야의 갈등도 그 나사 하나를 조이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 가장 핵심은 중도다. 이것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가정과 사회, 인류의 모든 갈등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중도의 가르침은 그만큼 중요하다.

나는 지금도 폐가 그리 좋지 않다. 젊어서 큰 폐병을 앓았는데, 수행을 하면서 중도를 깨우치고 몸의 병도 저절로 사라졌다. 지금도 CT촬영을 하면 한쪽 폐가 풍선처럼 늘어진 것이 보인다. 죽음의 고비를 넘고 나서, 중도를 조금 깨우치고 나서, 나는 나를 지극하게 사랑하게 됐다. 또 그만큼 남도 사랑하게 됐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 바로 중도의 힘이다.

지금 우리는 많은 욕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대립하고, 전쟁을 하고 있다. 그 욕망을 중도로 바꾸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지금 우리 인류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본주의도 그리스처럼 망해가고 있다. 그리스는 개신교가 처음 시작됐고, 민주주의를 가장 먼저 시작한 나라다. 그리스가 무너지는 것은 그래서 상징성이 크다.
인도에 암베르카드라는 위인이 있다. 천민 출신이었던 암베르카드는 어린 나이에 영국에 건너가 유학을 하고, 2차 대전 후 네루 정부에서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영국 변호사로 있던 그는 인도에서 와줄 것을 요청하자 처음에는 거절했다. 뿌리 깊은 사성제의 고리를 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암베르카드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해방된 인도를 찾았다. 하지만 힌두교의 뿌리깊은 사성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고리를 벗어나기 위해 그가 찾은 방법은 불교였다. 그는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택하면서 불교학에 심취했는데, 암베르카드가 이때 찾아낸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민주주의였고, 중도의 가르침이었다.

얼마전 승가에서 승풍을 실추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나’라는 욕망을 바탕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바꾸지 못한 결과다. 중도를 알았다면 세상의 어떤 일도 초월해 수행의 즐거움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종단에서 자성과 쇄신을 위한 결사를 한다길래 자진해서 결사위원으로 동참했다. 스님들을 대상으로 중도를 말하며 변화를 이끌어보고 싶었다. 의식이 바뀌면, 그에따라 제도도 변화될 수 있다. 스님들의 의식이 변화하면, 신도들의 의식도 변화되고, 결국 중도의 삶을 사회에서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백일법문도 그런 생각의 연장이다. 다음 강의까지는 중도가 무엇이며, 왜 중도인가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왜 중도를 공부해야 하는가를 먼저 살펴보자.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을 통해 아주 구체적으로 중도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며, 중도의 필요성을 말했다.

원시불교의 가르침에서부터 중도의 사상은 불교의 핵심이 되고 있다. 이후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이 성립됐는데, 중관사상 공 사상을 통해 현상을 보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유식사상은 공을 우선 이해하기보다 듣고, 보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면서 점차 공을 깨우치는 방식이다.

유식은 흔히 손에 비유된다. 손을 유심히 살펴보자. 손 바닥이 있고, 그 뒤에 손등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손바닥으로 존재하기도 하며, 손등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 뒷면을 인식해 두 개가 하나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유식이다.

한국불교역사문화 념관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열린 강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열기를 더했다.

우리가 일련의 갈등으로 인해 잃어버리는 예산이 꽤 많다. 일년예산의 20% 정도가 갈등으로 인해 허비되는 비용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도를 이해하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갈등을 없앨수 있는 지혜가 생각난다. 중도 가르침의 핵심은 지금 우리 자신을 잘못 보고 있다는 점이다. 나를 바로보는 기준, 잣대가 바로 중도다.

기독교와 회교, 힌두교, 도교를 정변설 종교라고 한다. 즉 하나가 모든 만물을 만드는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연기법의 종교다. 모든 만물이 독자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 가운데 연기를 말하는 종교는 불교 뿐이다.

부처님께서 짚단을 예로 들어 연기를 설명하고 있다. 짚단이 하나로는 서지 못하지만, 여러 개를 엮어 놓으면 서게 된다. 저절로 혼자 서지 못하지만 서로 의지가 돼야 설수 있다는 가르침이 곧 연기다. 즉, 저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원리다.

 그런데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독립된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다. 우리의 몸도 보자. 수억만개의 원자, 세포가 모여 이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같이 존재하는 세포를 보지 못하고, ‘나’라는 하나의 완성된 몸을 보며 집착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면 세포는 단일로 존재하는가. 역시 아니다. 수많은 원자들이 모여 구성하고 있다. 원자도 쪼개면 3~400개의 나노원자로 구성돼 있음을 알수 있다. 이것을 연기라고 하며, 즉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으로 귀결된다.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파인만는 물리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연기법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행복하고, 자유스런 삶을 살았다. 그는 불교를 전혀 몰랐지만, 그의 삶은 매우 불교적이었다.

왜냐면 파인만이 물리학 연구를 통해 깨달은 것은 모든 존재는 서로 연관돼서 존재한다는 연기와 중도의 가르침을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의 삶은 매우 자유로웠으며, 많은 대중의 인기를 얻고 살았다. 마치 대자유인과 같은 삶이었다. 나라는 집착을 벗어난 결과였다.

나라는 실체에 대한 집착은 결국 그래서 허구이고, 착각이다. 이것을 100% 이해를 한 사람을 우리는 깨달았다고 한다. 나는 불과 10% 정도 이를 깨달은 것 같다. 하지만 10%만으로도 내 인생이 변화했다.

우리는 나를 비방하는 말에 화를 내거나, 여러 일로 분노를 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연기적으로 이뤄져있고, 중도적인 것을 안다면 그런 일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다. 조주선사는 “본분사로 사람을 대한다. 만약 내가 사람의 근기에 따라 대한다면 삼선십이분교(수많은 종교와 가르침)가 생길 것이다”고 했다.

즉, 선으로 사람을 대하면 바로 깨우침을 얻을 수 있지만, 선의 가르침을 풀어 설명하려면 수많은 경전과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선으로 깨달음을 얻기란 쉽지가 않다. 24시간 화두를 들고 수행을 해도 깨우치지 못한다면 그는 불교의 가르침 근처도 못 가본 사람이 되고 만다.

깨달음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앞서 말한 파인만처럼 학문을 통해 중도를 깨우치기도 하고, 참선을 통해 깨치기도 한다. 때론 말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이같은 이는 매우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성철스님이 백일법문을 통해 논리적으로 불교를 설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화두를 들고 수행하라고 지도한 것이다. 성철스님이 법문을 시작하면서 한 이야기를 읽어보자,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경전이 있어서 다들 다른 말로 불교를 설명합니다. 다른 종교는 경전이 간단하지만, 불교는 통칭 팔만대장경이 있으니 설사 경전을 모두 알기도 어렵고, 설사 불교를 안다고 해도 간단히 불교를 무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불교는 간단히 말하면, 부처님께서는 일체만법의 본원을 바르게 깨우친 사람이니, 부처님처럼 그것을 깨우치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그 본원을 법성이라고 하고, 자성이라고 합니다.”

바다에 물이 잔잔하게 있는데 바람이 불었다고 하자. 잔잔했던 물이 바람에 출렁거려 파도를 만든다. 그 파도 속에 있는 물방울을 자성이라고 한다. 파도는 크기가 제각각 다르다. 파도는 때론 집체 만하기도 하고, 산더미 만하기도 한데, 물방울이 모여 만든 파도를 법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잘 보자. 물방울, 즉 자성이 모여 파도라는 법성을 만드는데 이 두가지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같은 것이다.

우리는 흔히 외형만 보고 너와 나는 다르다고 인식을 하는데, 법성을 바라볼 수 있다면 너와 내가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 사람과 나는 같은 존재라는 법성의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는데서 불교는 시작된다. 그 이해를 점점 넓혀가는 것이 바로 수행의 깊이다.

차근차근 불교를 알고, 수행을 해 나간다면 점점 이해심도 넓어지고, ‘나’에 대한 재미도 생겨난다. 그 과정도 매우 즐겁고 행복감이 느껴진다. 또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듣고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겨, 다른 사람들의 존경도 받게 된다. 그 근본은 중도이며, 중도는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인 사고로 변화시키는 힘이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지금 우리 불교가 해야 할 일은 중도의 가르침을 회복하고, 상대를 나와 같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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