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묘엄 스승님께 드리는 글’

나는 15세에 묘엄스승님을 청도 운문사에서 만났다. 1967년의 일로 기억한다. 스승님을 운문사에서 2년,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다시 수원 봉녕사에서 3년간을 모셨고, 중강으로 다시 3년을 모셨다. 처음 운문사에서 뵈었을 때, 그 때의 감동을 지금도 기억한다.

모습도 거룩하고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자상하신 그 모습이 어린 내 가슴에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스승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모범생이 되려고 노력했다. 배운 글을 하루에 300번 이상 읽어야 문리(文理)가 터진다고 해서 그 말씀도 지켰다. 그 때 도반으로 성학스님과 현 봉녕사 학장 도혜스님이 함께했다.

그 당시 나에게 스승님은 대중 속에 높이 계시는 나의 이상향이었다. 그리운 사람을 짝사랑하듯이 낮에는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문틈으로 지켜보았고 밤에는 늘 그리운 마음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분을 닮아보려고 했던 일들은 나에게 희망이었고 즐거움이었다.

하루 300번 경전 읽어서

경전 보는 힘 길렀던 일

대학졸업하려 했던 일도

스승님이 깨우쳐주신

큰 은혜였습니다

스승님이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책을 옮기는 울력을 하게 한 것이었다. 그 때, 대중 막내인 나에게 “너는 어려서 책은 무거우니까 이거나 날라라”하고 건네주신 것이 스승님의 동국대학교 졸업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손에 받아 쥐고 보물을 얻은 듯 가슴이 설?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나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게 되었다. 스승님이 그렇게 거룩해 보였던 것이 대학을 졸업하셔서 그런가보다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일은 한글전용을 선포한 신문을 읽고서였다.

새로 지은 방의 초배를 바르기 위해 우리 반에게 던져준 오래된 신문에 이제 한문은 쓰지 않고 한글을 전용한다는 기사를 읽는 순간, 세상에서 쓰지 않는 한문만 매일 읽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 웠다. 그날부터 경 읽던 일을 던져버리고 대학 갈 일을 꿈꾸었다.

이제 돌이켜보면 하루에 300번 경전을 읽어서 경을 보는 힘을 길렀던 일도, 큰 충격 속에서 대학을 졸업하려고 발돋움했던 일도 스승님이 깨우쳐주신 큰 은혜였다. 그 뒤에 많은 숨은 이야기들이 스승님과 나의 삶속에 엮여져 있다.

때로는 스승님과 가장 먼 거리에 서있기도 하였고, 그 먼 거리가 운문사에서의 나날을 추억하면 할수록 허허롭고 무상했던 마음으로 보낸 시절도 있었다. 첫 번째 제자이면서 제일 늦게 전강을 받게 된 이유도 거기에 담겨 있다.

이제 스승님은 떠나셨으나 그 은혜는 단절 없이 나에게 지속되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부족한 제자에게 봉녕사 한 구석을 채우라고 당부하신 마음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제 나 개인의 스승이 아니라, 한국비구니계의 스승이시며 봉녕 출신 모두에 소중한 스승이시다. 그 분의 모습과 당부를 마음에 간직하고 가르침을 조시(弔詩)로서 올렸다.

그 옛날 영산회상 대애도 연꽃 자취

오늘 날 광교산하 고이 오셔 머무셨네.

사바 인연법의 향기 온 누리에 뿌리고서

바람 되어 떠나신 님 허공 속에 영원하리.

부처님 정법안장 세주묘엄 고운 모습

수행으로 날 새우고 삼장강독 날 저무네.

나의 제자 비구니여 청정계행 바로 세워 

부처님 거룩한 법, 미래영겁 불 밝혀라.

천고(千古)에 가르침은 만고(萬古)의 진리 등불

봉녕문하 수행니(修行尼)여 보불은혜 당부하네.

[불교신문 2817호/ 5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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