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부처님오신날의 연등축제는 언제부터 행해졌나요? 연등축제가 불자들의 행사가 아닌 모든 분들의 축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A : 매년 부처님오신날을 즈음하여 열리는 연등축제는 연등회(燃燈會)가 공식 명칭입니다. 연등회는 올해부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연등회가 삼국시대 이후 불교계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민족전통의식으로 문화적 역사적 가치가 중요하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연등회의 가치 보존과 전통 복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법적인 제도의 틀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등회의 체계적인 보존과 전승이 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흔히 연등축제라 하면 연꽃모양의 등축제로 이해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연등(燃燈)이란 등불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연등행렬은 그 자체로 대단한 장관(壯觀)이지만, 불교에서 ‘등’이라는 말은, 바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가르침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등은 어리석음과 어둠을 밝히는 의미로 지혜에 비유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전에 등을 켜서 바치는 등공양은 향공양과 더불어 매우 중요시 되었던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에 연등회가 실시된 기록이 있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적 행사가 됩니다. 처음에는 연등회가 정월 보름에 실시되었다가 나중에 2월 보름으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유행경(遊行經)>과 같은 경전의 2월 불탄일(佛誕日)에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삼국시대 처음…고려 말부터 본격 시행

50만명 동참하는 국민 축제로 ‘발돋음’

지금과 같은 부처님오신날의 연등회는 고려 말 공민왕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이 날은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왕이 직접 절로 행차하여 진행했다고 하지요. 이 연등회의 제반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인 연등도감이 설치될 정도로 국가적인 행사였습니다. 조선시대 와서는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인해 연등회가 금지되기도 했는데, 민중들은 꾸준히 연등회를 지속했다고 합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연등축제는 1975년에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되고, 그 이듬해인 1976년부터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진을 하면서 시작이 되었는데요, 그때는 행진거리가 길어서 처음에는 모두 즐겁게 출발했다가 나중엔 지쳐서 겨우 신심(信心)으로 끝내곤 했답니다. 행사의 완성도도 현저히 떨어졌고요.

그동안 장소도 동대문운동장과 동국대에서 종로를 거쳐 조계사까지로 바뀌고, 우정국로에서는 다양한 축제행사를 펼치는 등, 이제는 다함께 즐기는 참여형 축제의 모습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렇게 연등회는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코드로 성장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1200여개의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린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연등회는 단연 돋보입니다. 참여하는 외국인들의 숫자는 웬만한 국제행사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었고, 외국 언론사들의 취재 열기도 뜨겁습니다. 연인원 50만 명, 직접 행사 참가 인원만도 3만여 명에 이르는, 그야말로 장엄한 축제가 되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바탕이 되고,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참여가 이루어질 때, 축제는 생명력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500년의 배불(排佛)정책에도 살아남은 것입니다.

민중들의 삶이 힘들 때 부처님은 의지가 되었고, 등을 켜며 소원을 표현하는 연등회는 민중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었습니다. 연등회가 앞으로도 계속 중생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주는 도구로서 발전하도록 불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동참이 필요합니다.

[불교신문 2816호/ 5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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