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林送客處(동림송객처) 동림사 절 앞에서 손님 배웅하는데 月出白猿啼(월출백원제) 달이 밝게 떠 있고 원숭이가 우는구나.別廬山遠(소별여산원) 웃으며 헤어지던 여산의 혜원스님 何須過虎溪(하수과호계) 아뿔싸, 그만 호계의 다리를 건너고 말았네.

위의 시는 ‘호계삼소(虎溪三)’의 설화를 두고 당나라 때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지은 시다.동림사(東林寺)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남쪽에 있는 여산(廬山)의 기슭에 있는 절이다.

동진(東晋) 때 혜원(慧遠, 335~417)스님의 도반이었던 혜영(慧永)스님이 먼저 서림사(西林寺)에 머물렀다. 이어 혜원스님을 이곳으로 오게 한 후 당시의 자사 환이(桓伊)에게 부탁해 산의 동쪽에 스님을 위해 지은 절이다.

중국 혜원스님 동림사 정진 중

유불선 진리 하나임을 깨달아

고사성어 ‘호계삼소’로 알려져

여산은 동진시대부터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명산으로 70여 개의 사찰이 있어 명실공이 강남불교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향로봉, 오로봉, 자소봉, 철선봉 등 40여 개의 봉우리가 있어 경치가 아름다워 역대의 문인 명사들이 이곳을 찾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송대(宋代)의 소동파도 이곳을 찾아와 품격 높은 시를 짓기도 했다. 동림사는 향로봉 아래에 위치해 경관이 수려했으며, 근처에 폭포가 있는 계곡이 있었다. 이 계곡에 호랑이 우는 소리가 자주 들려 ‘호계(虎溪)’라고 불렀다.

혜원스님은 이 절에 선림을 세우고 서역지방에 있는 불영굴(佛影窟)을 본 따 불영당(佛影堂)을 조성했다. 그 뒤 이곳에서 염불삼매를 닦는 모임을 만들어 염불수행에 힘썼다. 이를 후대에 백련사(白蓮社) 혹은 백련결사(白蓮結社)라고 불렀다.

이는 사영운(謝靈運)이 이곳에 연못을 파고 흰 연꽃을 심었기 때문에 불러진 말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동림사는 정토종(淨土宗)의 발원지로 여겨져 왔다.

당나라 때 이 절은 매우 번창하다가 무종(武宗) 때 회창법란(會昌法難)을 만난 뒤 황폐화 되었다가 선종(宣宗) 때 다시 복원 되었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는 이 절을 ‘동림태평흥국선원(東林太平興國禪院)’이라고 불렀다.

그 뒤 원나라 때 보도(普度)가 이곳에서 <여산연종보감(廬山蓮宗寶鑑)>을 저술했다. 그리고 일본에 정토종 교의를 전한 감진(鑑眞)스님이 일본에 건너가기 전 이 절에 머물면서 연종 교의를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혜원스님이 이 절에 있을 때 시인 도연명(陶淵明)과 도사(道士) 육수정(陸修靜)이 스님을 찾아와 담론을 나누었다. 이 때 혜원스님이 평소에 절 앞에 있는 계곡의 다리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원을 세워 두고 있었는데도 배웅할 때 담소를 나누며 걷다 미쳐 다리를 건너는 줄도 모르고 다리를 건너버렸더니 호랑이 울음이 들려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고사가 있어 이를 두고 호계삼소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불교신문 2807호/ 4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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