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 달마도 풍년’ 이대로 좋은가

멀리서 바라보면 논에 파랗고 풍성하게 벼가 가득 자라고 있어 풍년을 준비하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면, 벼보다 잡초가 더 많이 자라고 있다면 농사는 망치게 되어 흉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잡초를 뽑아서 벼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농사짓는 사람에겐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농사짓는 사람이 벼와 잡초를 분간하지 못한다면 앞날을 굶으며 긴 겨울을 보내야 할 처지가 될 것이다.

마음 밭을 갈아서 법의 농사를 짓는 불교 집안에 달마도에 대한 유행의 바람이 일어난 것은 약 5년 전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소설 같은 달마도의 신비스런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로부터 TV와 신문을 통해서 붐을 일으키며 몇 년 동안 전성기를 누리다 혹세무민의 도를 지나쳐서 2년 전 MBC ‘PD수첩’에서 방을 맞고 좀 수그러져 잠잠하는가 했는데, 얼마 전 가짜 달마도 사건이 만천하에 알려져 달마도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어 달마조사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감을 주게 되었다.

아무 달마도라도 세상에 많이 퍼지고 알려지면 불교가 많이 포교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불교를 어리석게 믿는 미신과 우주진리(불법)를 믿고 실천해서 깨달은 진리와 하나가 되는 불교를 분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벼와 잡초를 분간하지 못한다면 불교의 탈을 쓴 미신세계가 더욱 퍼져 나갈 뿐이다. 양적으로 많아지는 것 보다 질적으로 바른 정법의 불교가 포교되는 것이야말로 불법의 올바른 발전이다.

달마조사는 불교의 오랜 역사 속에서 많은 봉우리 가운데 부처님 다음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의 대조사로, 정신세계의 최정상에 계신 최상승 정법 불교인 선(禪)의 대스승이다.

달마조사를 소승불교의 방편법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신세계의 기복신앙의 부적으로 귀신의 보스쯤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추락시킨 유행의 시작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달마조사를 망신시키고 불교를 오도시키며 미신적 관념을 조장하고 장려하는데 일조를 했던 것이다.

미신적인 관념으로 기복신앙의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교신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바른 가르침을 지도해야할 스님들까지도 달마도를 부적으로 만들어 중생들의 마음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불자들에게 마구 뿌린다는 것은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모양만 비슷하게 그린 아무 달마도라도 집에 걸어 놓으면 재앙을 막아주고 만사형통하는 부적이란 것인가. 달마도가 무엇이며 달마도의 영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희비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기복신앙에도 두 가지가 있다 

달마도는 미신적인 부적이 아니고 불교 최상승 정법인 참선수행의 선 기운으로 그리는 선화(禪畵)이다. 달마 스님은 선화 중에 가장 많이 그리는 대표적인 소재인 것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 왔을 때, 샤머니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불법으로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포옹했던 것이다.

유치원 과정이란 초등학교에 가기 위한 과정이지 평생 유치원만 다녀서야 어찌 발전이 있겠는가.

한국불교가 형상중심의 기복과 가피 신앙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해오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나의 본성을 깨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이르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탐(욕심), 진(성냄), 치(어리석음) 삼독을 버리는 것이고, 이 삼독(三毒)을 버리기 위해서 수행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노력하기보다 부처님에게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기를 기원한다.

부처님 법에 의한 기복신앙은 우리 마음을 가리고 있는 업장을 여러 수행 방편을 통해서 녹였을 때, 그만큼 더러운 마음이 닦여져서 마음이 열린 만큼 본성에 본래 갖추고 있는 복과 지혜가 밝아지고 맑아진다. 밝고 맑아진 만큼 삶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마음을 닦은 만큼 행복이 커지고 결국에는 마음의 때(업장)가 다 녹았을 때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무루복(無漏福)과 지혜를 얻게 된다. 이것을 견성성불이라 하고 해탈이라 하며 불교의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육도윤회를 벗어나서 생사해탈하여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른 기복신앙은 성불로 가는 길이요. 무루복(無漏福)를 성취하는 길이다.

그러나 미신적 기복신앙은 현실적 유루복(有漏福)만을 구하고 인과법의 진리를 무시하고 업장을 닦지 않고, 복만 받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믿음으로 환상의 세계 속에 사는 신행행태로, 이러한 기복신앙은 성불의 길로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육도윤회에서도 벗어날 수 없고, 생사 해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불교가 아니다. 자기가 지은 업은 자기만이 닦을 수 있지 부처님도 대신해 줄 수가 없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의 병을 고치는 길을 가르쳐 주신 영원한 진리의 스승이다. 불자 중에 미신적인 관념의 기복신앙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한국불교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한국사찰이 이러한 기복신앙을 하는 사람들을 위주로 하지 않는다면 운영이 어려울 지경이라는 것이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 현실의 토양이 미신적 달마도 부적이 붐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이 되는 것이다.

서울 국제선센터 금차선원에 봉안되어 있는 범주스님의 달마도 '천년선화'.
과학문명의 발달로 세계는 한 집안이 되어 가고 있고, 정보 매체의 발달로 현대인들의 의식이 많이 높아지게 되어서 웬만한 방편 법으로도 통하지 않고, 물질에 치여서 인간성의 사막화 현상으로 인해 진정으로 진리의 샘물에 목말라 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인간성 회복을 위하여 동양정신의 정점인 선(禪)의 붐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불교의 전통 정법인 활구 참선법을 보존하고 있다는 긍지를 갖고 있는 한국불교가 미신적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앞으로 한국불교의 질적인 발전과 미래는 없다.

이런 분위기로 계속 나간다면 지성인들과 젊은 사람들은 유치한 한국불교를 외면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한국 불교의 미래가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달마도를 그리는 사람 가운데 잘못된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미신적 기복신앙 관념의 부적으로 그리는 사람. 둘째 신기(神氣), 삿된기(邪氣)로 그리는 사람. 셋째 선수행 없이 불교이론만 알고 그림손재주로 그리는 사람.

선수행의 근본 바탕이 없으면 어두운 기운을 갖게 된다. 어두운 기운으로 그려진 달마도는 보는 사람에게 어두운 기운을 전해 줄 수 밖에 없으며 어두운 기운이 많아지면 어두운 일들을 불러들인다. 같은 에너지의 기운은 서로 끌어 당기기 때문이다.

참선수행을 통해서 밝은 기운(선기)을 가지면 선화를 통해서 전이돼 마음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고, 마음이 밝아지면 어두운 기운은 사라지고, 밝아진 만큼 그 사람의 인생이 전반적으로 밝은 삶의 질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달마도의 영험인 것이다. 달마도는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수행을 통한 밝은 기운이 달마도를 그리는 사람의 선수행의 기운이기 때문에 수행을 통한 밝은 기운이 사람들을 돕는 영험한 기운이 되는 것이다.

불교 최상승 참선공부의 방법이요, 예술을 통한 포교 방법인 선화(달마도)를 미신세계의 부적으로 추락시켜서 미신적인 기복신앙만 조장하여 중생들을 영원히 육도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신의 길로, 선의 원조인 달마상을 이용해 미신의 길로 이끌어 불교를 오도(誤導)하고, 달마조사를 망신 시키는 일들은 불법을 비방하는 대죄를 짓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종단에서나 불교 매스컴에서도 달마도를 부적으로 악용하는 일을 방관해서는 안될 것이다. 부적 달마도의 유행은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진실이 아니고 허이기 때문이다.

달마도의 진면목을 이해하고 동양 삼국 최초의 생불인 달마대사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모셔 영원한 행복인 견성성불의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기 바란다. 태양을 가리고 있는 구름이 벗어지면 태양의 빛이 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따뜻한 볕이 만물을 살피듯이 모든 인간에도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본래 갖고 있다.

그러나 업장의 탐심, 진심, 치심의 구름이 본성을 가려서 어둠과 고통의 중생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마음을 닦아 업장의 구름을 녹이면 그만큼 지혜와 복은 많아져 그만큼 인생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결국엔 업장의 구름이 모두 사라지면 영원히 행복한 해탈세계에 살게 된다. 이것이 성불(成佛)이다. 육도윤회의 악몽을 벗어나서 영원히 고통 없는 진정한 삶이 되는 것이다.

세 가지 잘못된 유형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오신 뜻이나 달마스님이 중국에 오셔서 9년 고행하신 목적이다.

달마조사의 가르침인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최상승 불교 정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미신적인 기복신앙의 관념으로 오랜 불교 역사 중에 우뚝 선 진리의 봉우리인 달마조사를 추락시키고 있다.

미신세계의 부적으로 둔갑시켜 망신을 시키는 것도 도를 너무 지나쳐 현실 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방황하는 순진한 사람들을 육도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영원히 생사를 해탈해서 무루복(없어지지 않는 복)을 성취할 수 있는 불교의 정법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

영원히 육도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신의 길로 이끌고 있음은 불법과 달마조사를 비방하는 일이다. 이는 참회할 길 없는 무간 지옥의 업을 자신도 모르고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달마도 부적의 좋지 못한 이미지 때문에 선 수행과 포교의 좋은 방편인 선화까지 휩쓸려서 매몰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선화가 원래대로 재정립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방관만 하는 것도 불자로서 동업을 짓는 것이요, 불제자로서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산승이 펜을 들게 되었다. 사람 몸 받아 태어나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더더욱 어려운 일인데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불교 정법의 최고의 스승인 달마대사의 상과 인연이 되어 겨우 미신 부적으로 모시는 것은 상견, 사견에 집착된 마음으로 인과법도 무시하는 허황된 마음이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세세생생 육도윤회의 악몽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불교를 바르게 알고, 달마조사를 바르게 알고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마음 닦으면서 살아가면 날마다 행복이 더할 것이요. 세세생생 행복이 더 커질 것이요, 결국에 해탈 성불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순리(불법)와 함께 하면 행복이 오고 벗어나면 고통이 오게 된다. 다같이 불법의 바른 길로 살아서 모두 하나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발원한다.
 

■ 달마대사는 누구인가?

인도 남천축국의 왕자로 태어나서 출가해 도를 깨닫고 부처님으로부터 28대 조사의 법등을 받아 인도에서 많은 중생을 제도한 후 교외별전 선불교를 전하기 위해서 3년 걸려서 중국 양나라에 입국했다. 중국에 경전 불교가 들어 온지 500년 지나서였다.

불심 천자인 양무제를 만났으나 유루법에 집착된 의식에서 달마스님의 무루법인 최상승 선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위나라 숭산 소림굴에 들어가 9년 면벽 수행을 했다.

양무제에게 방편을 써서 공덕이 많다고 한마디만 칭찬했다면 국사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달마대사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무루법을 얻는 최상승 활구 참선법을 전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건너 왔기에 법을 전할 제자를 기다리며 면벽 9년의 인욕 정진을 했다. 그리고 혜가를 만나 법을 전하는 임무를 완수하자 양무제가 내린 사약을 받았지만 다시 살아나 인도로 돌아갔다.
 

■ 달마도란 무엇인가?

달마도는 선화(禪畵)로써 옛날 중국에서 선(禪)불교가 한창 번창할 때 많이 그려졌고 일본에서도 스님들 간에 많이 그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분의 달마도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달마도에는 선구를 넣어서 선을 수행하는 스님들이 그렸다. 달마도란 미신세계의 부적이 아니고 선(禪)수행을 통한 선기(禪氣)로 그리는 선화인 것이다.

확철대오(견성성불)를 목적으로 참선 수행하는 사람이 정진한만큼 업장이 녹아져 마음이 열린 만큼, 본성의 지혜광명의 기운(禪氣)으로 붓을 통해서 표현된 글씨나 그림을 선묵(선화)이라 한다.

이러한 선화는 보는 사람에게 이심전심으로 전하여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선화는 수행정진의 한 방법이면서 직관적으로 가슴을 통해 정화시키는 교화 방법이다. 선화는 예술로서 정신 차원으로서 최상의 예술이다.

아무리 그림 기교의 재주가 대단하다 해도 수행력이 없으면 빈 껍데기만 있는 것이요, 아무리 수행력이 깊다 해도 표현 방법이 유치하다면 수행의 밝은 기운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전달이 되지 않는다. 선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꾸준한 참선수행과 붓의 용필 수련을 쌍수로 정진해나가야 한다. 용필 속에 선기(禪氣)가 하나로 용해되어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닌 가슴으로 보는 그림, 즉 마음을 비워주는 그림으로 본성으로 가는 길을 도와주는 그림이다.

참선 정진으로 유심의 고개를 넘고 넘어 무심에 이르고, 붓 용필 정진으로 기교의 고개를 넘고 넘어 무기교에 이르러 무심과 무기교가 하나가 될 때 진정한 선묵을 이룬다.

스님이 그린다고 모두 선화가 아니고, 불교 소재를 그렸다고 해서 선화도 아니다. 참선 정진을 통한 선기와 필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선화는 스님들의 취미나 액세서리가 아니고, 깨달음을 향한 수행자들의 정진 방법인 것이다. 참선수행이 없으면 선기가 없고 선기가 없는 그림은 선화가 아니다.

[불교신문 2787호/ 2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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