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불자 성금으로 건립…성장하는 불교 대변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불교회관이 속속 건립된다. 정화와 통합종단 초기에는 업무가 많지 않아 별도의 건물을 가져야 할 필요성이 적었지만 점차 종단 규모가 커지면서 현대식 빌딩이 필요해졌다. 종단 출범 초창기 종단은 그야말로 연락사무소에 불과했다. 1960년대 말부터 점차 종단 업무가 많아지다 1970년대 들어서면 종단도 획기적으로 발전한다. 업무량도 많아지고 사람도 늘어나 별도 청사를 지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돼 있는 총무원 청사, 즉 불교회관은 1975년 11월30일 준공해 숱한 영욕을 겪다가 2003년 8월31일 현재의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입주한지 한 달 여 만에 외부 폭력세력에게 점령당했던 구 총무원 청사는 그 후 20년 넘게 종단 사태 와중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청사를 점령하기 위해 뺏고 빼앗기는 공방이 벌어지고 그 장면이 전 세계로 방영돼 국제적인 망신을 사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5년 11월 현대식 총무원 청사 준공 

회관 건립 첫 결의 2년 만에 기공, 기공 4년 뒤 완공

하지만 이 건물은 1970년대 불교 발전의 상징이며 미래의 희망을 안고 출발했다. 통합종단을 통한 한국불교 중흥의 염원을 반영해 세운, 한국불교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중요한 공간이다. 이 건물은 1975년 11월5일 완공해 30일 준공식을 가졌다. 이에앞서 7일부터 동국대에서 이곳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준공식 당시 불교신문 보도를 보자. 현대식 불교회관을 소유하게된 당시 종단 스님들의 벅찬 감회가 잘 드러나 있다.

‘신축 불교회관 준공식이 지난달 30일 오전 11시 종정 서옹대종사를 비롯 종회의장 영암스님, 장로 대의스님, 동화사 주지 향곡스님 및 종회의원 등 교계 대덕스님과 전국신도회장 김제원 박사, 천도교 최덕신 교령, 한국관음회 김상봉 회장 등 내외 인사 및 일반신도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회관 법당에서 열렸다. 이 날 준공식은 동대부고 밴드반의 삼귀의에 이어 총무부장 고산스님의 개회사, 재무부장 월서스님의 경과보고, 종정예하의 법어 순으로 진행됐는데 이날 종정 서옹대종사는 “1천만 불교도가 총화단결하여 호국안보의 민족적인 사명을 다해야 할 때에 종단의 종합청사인 불교회관이 건립되었다”고 말하고 “이는 종단의 합리적인 운영체계 확립에 그 기초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종정예하는 이어 “이 회관은 사부대중에게 참된 신심을 고취하는 성전(聖殿)임과 동시에 종단 만년대계를 이룩하는 행정적인 기점으로서 그 의의는 크다”고 말했다. 종정예하는 이어 “중앙에 건립한 것으로만 그치지 말고 연차적으로 전국 주요 지점에 이같은 회관을 건립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감사패 전달식이 있었는데 이번회관을 시공한 황경석씨(경진건설대표)외 3인에게 종정예하의 감사패가 주어졌다. 이어 종회의장 영암스님, 장노 대의스님, 전국신도회장 김제원 박사, 천도교 최덕신 교령, 한국관음회 김상봉 회장의 순으로 축사가 있었다’

조계사 대웅전 뒤편 약 153평의 대지위에 선 불교회관은 연건평 1600여평의 당시로는 가장 큰 현대식 불교건물이었다. 공사기간 4년에 총공사비 2억여원이 들어간 회관은 지하 1층 지상 5층에 지하는 보일러실과 식당, 1층은 법당을 겸한 회의실 공간이었으며 2,3,4층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그리고 꼭대기층은 종정 총무원장 각 부장 스님들의 거실로 사용했다. 이 골격은 청사가 헐릴 때까지 그대로 유지됐다. 사무실에 입주한 단체는 총무원의 각 부서 외에 불교신문, 전국신도회, 중앙포교사단,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청소년교화연합회 등 신행단체들이었다.

이 건물이 완공되기까지는 많은 난관과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통합종단 출범 후 총무원 사무실은 조계사 입구에 자리했다. 당시 조계사 입구는 지금과 달랐다. 양옆으로 집들이 있어 골목길과 같았다. 그 중 한 집을 사무실로 사용한 것이다. 조계종은 1954년 정화운동을 시작해 1955년 비구승 중심의 종단을 설립한다. 선학원에서 조계사로 옮겨와 종단을 만든 비구승은 사무실과 회의실을 겸한 현대식 건물 불사에 곧바로 착수한다. 1956년 10월 조계사 법당 동편에 약 200여 평 규모의 2층 승당과 회관을 건축하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57년 10월 규모를 줄여 2층 140여평 규모로 변경해 1959년 5월 준공한다. 바로 정화기념회관이다. 정화기념회관 조계사 회관 등으로 불린 이 건물은 역사가 깊다. 1960년 11월24일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6비구 순교를 결의한 곳이 바로 이 공간이다. 정화기념회관은 건립 후 곧바로 중앙총림을 설치, 70여명의 학인을 교육하는 도제양성의 산실역할을 했다. 중앙종회 등 각종 회의도 이곳에서 열렸다. 1기 중앙포교사로 간결하고 지적인 교리 해설과 법문으로 1970~80년대 대학생과 청년들 사이에 유명세를 떨쳤던 무진장스님이 이 건물 2층에 사무실을 두고 있어 당시 학생들은 무진장스님에게 법문을 요청할 때는 꼭 정화기념관을 찾았었다. 이 건물은 조계사 도량 정비가 한창이던 1993년 헐려 요사채인 육화당(六化堂)이 들어섰다가 이 마저 얼마 뒤 헐렸다. 지금의 조계사 주차장 관리 사무소가 있는 자리 주변이다.

정화기념회관과 별도로 일상적인 종단 업무를 진행하던 사무실은 조계사 입구에 1950년대 말부터 1972년까지 존속했다. 기본 업무는 물론 중앙종회 등도 이곳 총무원 사무실에서 열렸다. 그러던 중 1969년 당시 총무원장 영암스님이 불교회관 건립을 포함한 종단 10대 중흥불사 추진 계획을 발표한다. 총무원 청사 건립이 처음으로 공표됐다.  이어 1969년 7월5일 열린 제20회 임시중앙종회에서 불교회관 건립 승인이 난다. 종회의원들은 별 이의없이 회관건립에 찬성, 7명의 위원을 선임하고 세부적인 계획안을 일임한다. 종회에서는 불교회관건립불사 추진방안과 추진위원회 규약이 결의된다. 추진방안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이 불사는 거족적인 불사로서 15,000여명의 승니 전원과 600만의 신도 전원이 참가케 한다. 2, 이 불사는 총 공사비의 반액은 승니의 특별의무적 성금과 가능한 사찰재산 전환 조치분으로써 충당하고 약 반액은 신도 성금으로 충당할 방침이다. 3, 이 불사는 기금의 조성에 따라 점진적 방법에 의하여 시행한다. 4, 이 불사는 금년 2월 말일 까지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기금 조성에 착수케 하고 6월 말일까지 설계를 완료하고 8월 말일 경에 기초공사에 착공한다. 5, 승니의 성금과 가능한 사찰재산 전환 조치는 총무원이 책임지고 신도의 성금은 각 신도단체가 책임 질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 건물에는 대강당 회의실 강의실 연구실 출판실 신문사 방송실 영사실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기념관 역경원 선원 전시장 휴식실 귀빈실 식당 예식장 사무실 등 불교 관련 모든 시설을 수용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종합회관으로 추진위원에는 정부인사까지 두도록 해 범불교적인 불사로 정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1959년 정화기념회관 조계사에 건립, 도제양성 요람

1950년대 말부터 1972년까지 청사 조계사 입구 자리

이 당시는 종단이 처음으로 갈등을 일으킬 때였다. 청담스님을 중심으로 한 선학원 계열과 통도사와 수덕사를 중심으로 화동파가 연합하여 갈등하기 시작했다. 1969년 7월 제20회 임시중앙종회가 정점이었다. 청담스님을 지지하는 수좌들이 중앙종회를 에워싼 가운데 영암스님이 주도하는 종단 집행부 퇴진을 요구해 영암스님은 사표를 제출한 상태에서 회관 건립안을 발표했다. 영암스님은 그러나 종회에서 재신임 받는다.

재신임을 받은 영암스님은 이 해 7월15일 다시 종단 발전의 일환으로 불교회관 건립과 중앙교육원 설립 등 7대 중흥불사 계획을 발표한다. 그리고 7월22일 불교회관건립을 위한 기획위원회가 구성돼 불교회관의 세부안이 확정 발표된다. 조계사 대웅전 뒷편 200평 대지 위에 17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소요 예산은 6억원이었다. 예산 중 3억원은 본말사의 소유 재산을 매각한 자금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신도와 단체 모금운동을 통해 보충하기로 했다.

영암스님은 지금도 최고의 ‘사판승’으로 명성을 떨치는 종단 살림의 으뜸이었다. 경산스님 총무원장 시절 발생했던 부채를 1년도 안돼 모두 갚고 조계사에 200만원을 남겨 종단의 칭송이 자자했다. 모두 매각돼 경내마저 경매에 부쳐질 정도로 망가졌던 봉은사 땅을 되찾은 분도 바로 영암스님이다. 아마 종단은 영암스님의 재정 확보 능력을 믿었던 듯 하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서울 시내에 찾아볼 수 없는 초대형 건물을 짓겠다고 나섰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설계도까지 만들어 9월 착공키로 했던 이 건물은 영암스님의 사퇴로 중단된다.

8월 청담스님의 종단 탈퇴 사건이 일어나고 그 책임을 지고 9월 영암스님이 사퇴한다. 이어 월산스님이 총무원장을 맡는다. 집행부는 바뀌었지만 불교회관 건립 추진은 계속된다. 이런 가운데 덕산 이한상 거사가 중구 인현동 풍전상가에 풍전회관을 건립하면서 이름을 불교회관으로 짓고 각종 불교강연, 문화행사 용도로 사용한다. 1970년 5월24일 건립한 이 회관의 이름은 삼보회관으로 건평 300평에 수 천명이 수용 가능한, 당시로는 가장 큰 현대식 불교회관이었다. 한동안 불교신문이 이 건물에 입주해 일한다.

부산에서는 1970년 말 대각사가 1800평 규모의 회관 건립에 착수한다. 그리고 1970년 12월 이한상 거사의 풍전건설이 정부종합청사를 준공한다. 경제개발이 본 궤도에 올라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종단 안팎에서 현대식 건물 붐이 일어났고 종단도 불교회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  

[불교신문 2714호/ 4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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