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스님이 세운 뉴욕 원각사 모습. 32만평의 넓은 대지위에 세운 대표적 한국사찰이다.
 
 
 
1973년 종단 주도로 ‘국제포교사’ 파견 시작
 
 
 
숭산스님의 뒤를 이어 1973년부터 스님들이 잇따라 미국으로 향했다. 주로 총무원에서 해외 포교 주무 부서인 사회국장 소임을 맡던 스님들이 태평양을 건넜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1960년대 말 유학생들의 도미(渡美)에서 시작된 미주 포교가 숭산스님을 거쳐 이제 조계종의 젊은 스님들이 차례로 나선 것이다.
 
 
정달·도안스님 등 주로 사회국장 소임자들이 나서
 
10여년간 동국대 발전 주도하던 법안스님도 도미
 
 
가장 먼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분은 정달스님이었다. 정달스님은 숭산스님이 미국으로 들어간 다음해인 1973년 미국으로 향했다. 정달스님은 당시 총무원 사회국장으로 국제청년불교도 대회에 조계종 대표로 참석하는 등 해외 문물에 일찍부터 눈떴다. 정달스님은 숭산스님이 보스턴에 개설했던 재미 홍법원에서 숭산 스님을 도우며 미국 문화를 익히고 현지 포교를 했다.
 
정달스님이 보스턴의 재미 홍법원에서 숭산스님과 함께 기거하며 포교한 시기는 1973년 2월7일부터 9월25일까지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1974년 3월10일 미국 LA에서 관음사를 개원, 주지를 맡았다. 카멜의 삼보사, 숭산스님의 LA 달마사에 이어 세 번 째 한국사찰이었다. 이날 개원식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자제인 필립안씨, 미국인 마아크, 로스엔젤레스 국제선원(일본사찰) 혜능스님 등이 참석했다.
 
이날 개원식에는 불교합창단이 처음 선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정달스님은 “구도 불교의 토대 위에서 대중포교에 전심, 한국불교를 미국에 심는데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원력을 밝혔다. 개원식에서는 관음사의 사업계획도 나왔다. 신앙생활의 전당으로 현대 생활인의 안식처로 24시간 개방, 일반법회, 노인법회, 청소년 법회를 통한 불교포교 진력, 불교도의 단합으로 교민생활 권익옹호위한 봉사, 영문 불교서적간행으로 미국인 포교, 한미불교문화 교류 공헌 등이었다. 관음사는 당시 월요일 오전 10시 청소년 법회와 11시에 성인 법회를 열었다.
 
1974년에는 법안스님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법안스님은 1963년 동국대가 대처측에서 통합종단으로 소유권이 이전될 때 법인 사무국장을 맡아 학교 정상화와 종단의 3대 지표 추진에 큰 기여를 했다. 미국으로 떠날 때 까지 10여년 간 동국대 이사, 상무이사, 부총장 등을 역임한 조계종의 교육 전문가였다. 법안스님은 숭산스님이 창건한 뉴욕 원각사로 갔다.
 
<사진>LA 관음사 개원 소식을 다룬 당시 <불교신문> 모습.
 
원각사에서 스님은 법회와 설법을 관장했다. 뉴욕 원각사는 최명심행 등 몇몇 보살들이 자체적으로 가정법회 형식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다 숭산스님이 미국으로 건너온 뒤 주지 스님을 요청해 당시 일본 홍법원에 있던 구윤각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구윤각스님이 원각사를 떠나는 바람에 숭산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L.A., 보스톤, 프로비덴스 등을 오가면서 신도들을 지도하던 중이었다. 법안스님은 1976년 부처님 오신날 행사를 마치고 원각사 부주지에서 주지를 맡았다. 원각사에 있던 미국인들과 숭산스님을 따르던 일부 신도들은 1977년 맨하탄 31가에 조계사를 개원하고 원각사는 온전히 법안스님의 책임아래 놓였다.
 
스님이 맡을 당시 월세였던 원각사는 법안스님의 원력으로 점차 규모를 넓혀갔다. 1978년 잭슨하이츠에 있는 건물을 매입해 자체 법당을 마련했으며, 82년에는 맨해튼으로 법당을 옮겼다. 이후 본사 급 규모의 사찰과 불교대학 설립을 발원한 스님은 1986년 뉴욕 업스테이트에 소재한 현재 원각사로 자리를 잡았다. 32만 평 규모의 현 원각사 자리는 유태인의 아동 여름 수련장으로 이용하던 곳이었다. 현재는 스님의 본사인 통도사 뉴욕 포교당으로 미국내 대표적인 한국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은 지난 2007년 입적했다.
 
LA 관음사를 개원해 주지를 맡던 정달스님이 얼마 뒤 환계식을 하고 속퇴했다. 신도들은 종단에 스님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당시 종정 서옹스님, 총무원장 석주스님, 서경보스님 등 종단 어른 스님들은 총무원 사회국장으로 있던 도안스님을 적격자로 선임했다. 도안스님은 총무원 재정국장으로 부처님 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추진한 공이 큰 스님이다. 사회국장으로 1975년 부처님 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추진하는 행사를 원만하게 마친 스님은 이해 11월 관음사 주지로 정식부임 했다.
 
당초 부처님 오신날에 맞춰 부임하려던 계획이 종단 행사 때문에 연기된 것이다. 그리고 입적 때 까지 관음사를 미국 서부 내 대표적인 한국사찰로 발전시켰다. <미주 현대불교>에서는 L.A 관음사를 두고 “ 미주한국불교계 사찰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건물가격도 높고 프로그램도 많다”는 평을 내린바 있다. 어려운 과정에서도 조금씩 적응해가던 스님은 1977년 신도 병문안을 갔다 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대형교통사고를 당한다. 걸음도 못걸을 정도로 심하게 다친 스님을 신도들이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본격적인 포교에 나선다. 도안스님은 2006년 입적했다.
 
1975년에는 대원스님이 하와이에 발을 디뎠다. 고암스님 상좌인 대원스님은 설악산 신흥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공부하던 중 1972년 하와이 주립대학 정치학교수 글렌 D.페이지 박사와 인연을 맺는다. 김동익 당시 동국대 총장의 소개로 신흥사에 집필차 갔던 페이지 박사는 한국불교의 하와이 파견을 권유하며 당신이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
 
페이지 박사의 주선으로 대원스님은 1975년 6월 하와이에 첫 발을 들였다. 대원스님은 그 유명한 하와이 대원사를 창건했다. 대원사는 가람 규모가 크면서도 한국에서 직접 목재, 불상, 석조 등 불사에 필요한 재료들을 가져다 전형적인 한국사찰 형식을 따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대원스님은 건물 불사 외에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 평화운동가, 불교전문가를 초빙해 인류 평화를 모색하는 평화 세미나로 더 유명하다. 스님은 또 남북한이 경색 국면에 있을 때인 1980년대에 북한을 방문해 남북불교 교류 초석을 놓았다. 한국에서 온 많은 유학생들을 뒷바라지해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촉진하고 미국과 한국 불교학의 가교 역할도 수행했다. 대원사는 무량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옥스님 1976년 비구니 최초 미주 지역 포교 나서
 
종단 지원 全無, 언어 장벽 뚫고 1세대 스님 모두 성공
 
 
1976년 봄 캐나다 토론토로 비구니 광옥스님이 입국했다. 앞선 스님들이 모두 비구승인 반면 스님은 비구니였다. 미주 지역에 첫발을 디딘 비구니 스님이었다. 동국대를 졸업하고 무진장 스님등과 함께 조계종 중앙포교사로 활동하던 스님은 캐나다 토론토에 자리잡은 불교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캐나다로 오게됐다. 도안스님처럼 광옥스님도 현지 교민불자들이 종단에 주지 스님 파견을 요청해 미주행이 이뤄진 것이다.
 
스님은 지난 2006년 불교신문에 쓴 칼럼에서 캐나다로 떠날 당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젊음과 용기와 열정으로 겁도 없이 종단에서 국제포교사 자격증을 받아들고 캐나다 토론토로 떠났다. 부처님을 조성하여 모시고 모든 서적과 절 하나를 세우는데 필요한 사물을 준비해 집도 절도 없는 낯선 땅에 불쑥 도착했다. 그때 우리나라 실정은 연탄 한 장에 15원이었고 전화도 부잣집에만 백색전화가 있었다. 텔레비전도 흑백이었고 200달러 이상 가지고 나가면 외화반출이었다. 밤과 낮도 한국이 14시간이나 빨라 한국이 낮이면 캐나다는 밤이고 정말이지 무엇이든 반대였다. 불자교포들의 도움을 얻어 집 한 채를 월세로 얻어 부처님을 모시고 ‘대한불교조계종 불광사’라고 간판을 붙였다.”
 
1978년에는 현호스님이 영주권을 획득하고 미국 포교에 나섰다. 스님은 LA 고려사를 창건해 현재 까지 포교에 매진 중이다.
 
이처럼 숭산스님 이후 1970년대 미주로 떠난 스님들은 이전 스님들과 달리 종단의 해외 포교 차원에서 파견됐다. 또 미리 와서 자리 잡은 현지 불자교민들의 요청도 작용했다. 하지만 모두 현지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였다. 광옥스님은 이에대해 불교신문 칼럼에서 “도무지 이 사람들이 무어라고 영어로 말하는데 무슨 말인지 무슨 소리인지 눈을 크게 떠봐도 안보이고 귀를 쫑긋해도 안 들렸다. 길도 모르고 차도 없으니 어디 갈 수도 없고 안 들리고 안보이니 말은 더군다나 못했다”고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회고 한바 있다.
 
스님들을 초청한 불자교민들이 지속적으로 스님을 외호하지 못한 점도 큰 장애물이었다. 이처럼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시 종단의 해외 포교 차원에서 떠난 스님들은 모두 미주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특히 이 스님들은 종단 차원에서 파견한 포교사였지만 종단의 도움은 일체 받지 못하고 오직 홀로 고군분투하며 현지 불자교민들과 힘을 합쳐 일궈낸 성과여서 의미가 크다.
 
이후 1980년대 부터는 더 많은 스님들이 미주 지역으로 발을 디디면서 현재 해외 교구 설립 움직임이 일 정도로 성장했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 2706호/ 3월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