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청일전쟁 당시 평양전투 직전에 일본군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 영명사. 오른쪽 끝에 부벽루가 있고, 그 앞에 팔각5층석탑이 보인다. 돌계단 주위에 영명사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 왼쪽에 덧붙인 삽화는 청ㆍ일군의 평양전투.  출처=중국갑오전쟁박물관
 
 
19세기 말 동아시아 국가의 운명을 바꾼 청일전쟁 직전 평양 영명사(永明寺)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흑백사진이 확인됐다. 중국 위웨이(威海)에 있는 ‘중국갑오전쟁박물관(中國甲午戰爭博物館)’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이다. 지난 1월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 학생들이 학술교류차 중국을 방문했을 때 전시 사실을 알았다. 1894년 청일전쟁의 분수령이 된 평양전투 장면을 담은 그림과 함께 전시된 흑백사진에는 평양 영명사의 전각들과 팔각5층석탑이 생생하다. 청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종결된 평양전투는 이후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평양전투 직전 日軍 촬영 ‘추정’
 
중국갑오전쟁박물관 전시 ‘확인’
 
 
흑백사진 오른쪽 중간에 보이는 전각은 부벽루(浮碧樓)이다. 진주 촉석루(矗石樓),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조선 3대 명루(名樓)’로 유명하다. 본래 영명사의 부속건물이었다. 또 하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부벽루 앞의 팔각5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인 10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고구려의 다각탑 건축기법을 계승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청일전쟁과 일제강점기를 넘긴 영명사 석탑은 북한 당국이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634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영명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세운 9개의 절 가운데 하나라는 전설이 전해오는 고찰이다. 고려 초기 곽여(郭輿, 1058~ 1130)가 영명사를 소재로 시를 읊은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선교양종(禪敎兩宗)의 36본사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대찰이었다. 하지만 청일전쟁 당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청일전쟁으로 큰 상처를 입은 영명사는 일제강점기에 재건되어 평양시와 평안남도를 관할하는 31본산이 되었다. 대동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위치한 영명사는 예로부터 ‘영명심승(永明尋僧)’이라 하여 평양팔경의 하나로 손꼽혔다. 영명심승은 ‘해가 질 무렵에 스님들이 영명사를 찾아오는 모습’이란 뜻이다.
 
이번에 확인된 흑백사진은 청일전쟁 직전에 일본군의 종군사진작가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흑백 사진 하단에는 빨래를 널어놓은 민가도 보인다. 또한 사진 좌측에 덧붙여 놓은 삽화는 모란봉 고지를 놓고 치열한 격전을 치룬 평양 전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외세가 우리 땅에서 벌인 전투로 선조들이 물려준 ‘아름다운 영명사’는 석탑과 돌계단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698호/ 2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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