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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3 (2019).2.1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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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춘성춘성
 
 
‘욕쟁이 스님’이 있었다. 거침없는 활구(活口)와 행동은 자유인의 경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만해(卍海)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춘성춘성(春性春城, 1891~1977)스님은 만공(滿空)스님 회상에서 정진하며 ‘자유의 세계’에 들어섰다. 깊은 수행에서 우러난 스님의 언행은 깨달음의 세계를 지향하는 후학들에게 경책이 되었다.
 
 
 
 
“한 평생이 화로의 한 조각 눈이로구나”
        
   
 ‘조선독립의서’ 상해임정 전달 ‘가교’ 역
 
 평생 ‘일의일발’… ‘相’에 얽매이지 않아
  
 
○… 민족대표로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은사 만해스님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이 무렵 춘성스님은 망월사에 머물며 은사의 옥바라지를 했는데,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은사가 차가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어찌 제자인 내가 온기 있는 방에 몸을 누이고 잠을 잘 수 있겠소”라며 스님은 방에 불을 땐 적이 없었다. 만해스님이 석방된 후에도 마찬가지. 동장군이 기세를 부리는 한겨울에도 냉기 가득한 방에서 참선하여, 보다 못한 도반들이 따뜻한 물을 강제로 입에 넣어주었을 정도였다.
 
○… 만해스님이 투옥됐을 당시 춘성스님은 수시로 면회를 했고, 이 과정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받아 범어사 스님에게 전달해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할 수 있도록 했다. 만해스님의 ‘조선독립의 서’는 1919년 11월4일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게재됐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한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서거하여 국민장을 치를 때 춘성스님은 선두에서 목탁을 치며 행렬을 인도했다.
 
<사진>생전의 춘성스님.  불교신문 자료사진
 
○… 덕숭산 만공스님 회상에서 정진할 때의 일이다. 어느 정도 공부가 익어갔다고 느낀 어느날 만공스님을 찾아갔다. 만공스님이 “別傳一句(별전일구)가 在甚處(재심처)인가”라고 묻자 춘성스님은 “喝(할)”을 했다고 한다. 만공스님은 춘성스님 어깨를 주장자로 내려치고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춘성스님은 삼배를 올리고 물러나와 정혜사 큰방으로 들어가 문을 폐(閉)하고 정진을 했다. 엄동설한에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했다. 매일 아침 문틈으로 넣어주는 생식 공양이 그대로 있어, 변고가 생긴 줄 안 대중이 강제로 문을 열자, 춘성스님은 미동도 않고 참선에 들어있었다고 한다.
 
○… 공부하는 도중에 만나는 마장 가운데 하나가 졸음이다. 불가에서는 이를 수마(睡魔)라고 한다. 춘성스님은 화두를 참구하던 젊은 시절 “수마를 이길 수가 없었다”고 토로한바 있다. 덕숭산에서 정진할 무렵 춘성스님은 “수마가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큰 장애”라면서 추위가 심한 북방에 자리한 금강산 유점사로 수행처를 옮겼다.
 
○… 유점사에 주석하며 정진하던 어느 겨울 젊은 스님을 불러 일렀다. “오늘은 장독대에 있는 가장 큰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라.” 엄동설한에 그것도 항아리에 물을 채워 놓으라는 춘성스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젊은 스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지시대로 했다. “스님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방에서 나온 춘성스님은 장독대로 가서 물을 채운 항아리에 몸을 담갔다. 금세 물이 얼어붙을 것 같은 강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몸이 상할까 걱정된 젊은 스님이 “스님, 이제 그만 나오세요. 그러다 큰일 납니다.” 춘성스님은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이렇게 해야 수마를 이길 수 있는 것이야.” 살을 에는 추위도 수마를 극복하고 정진하는 춘성스님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 덕숭산에서 정진할 때 춘성스님은 만공스님의 법제자가 됐다. 이때 화두를 청하는 춘성스님에게 “자네는 글을 너무 잘하니 글을 놓아야 화두를 주겠다”고 했다. 한때 ‘화엄법사’로 명성을 날릴 만큼 교학에 밝았던 춘성스님의 공부 깊이를 만공스님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의 뜻에 따라 글을 놓은 지 3일째 되는 날 춘성스님은 만공스님에게 ‘萬法歸一一歸何處(만법귀일일귀하처)’를 화두로 받았다. “일만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뜻이다. 훗날 스님은 무(無)를 강조하고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당신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고, 상(相)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했다.
 
<사진>스님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조선불교청년회 취지서.  불교신문 자료사진
 
○… 1910년 8월 설악산 백담사에는 만해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당시 시봉은 춘성스님. 한동안의 가뭄 끝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갑자기 춘성스님이 옷을 모두 던져 버리고 절 마당에서 춤을 덩실 덩실 추면서 은사를 찾았다. “스님. 비가 와요. 소나기가 와요.” 놀란 만해스님이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만해스님은 소낙비를 바라보며 “중생의 애를 태우고 이제야 퍼붓느냐”고 말했다. 춘성스님은 계속 춤을 추었고, 만해스님은 춤추는 것을 막지 않았다. 얼마 후 소나기가 멈추고 햇볕이 쏟아졌다.
 
○… 춘성스님은 평생 한 벌의 승복과 발우만 지녔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오직 수행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어려운 이들을 보면 외면하는 일이 없었다. 가난한 이를 보면 수중에 있는 얼마 안 되는 돈을 모두 주어야 마음이 편했고, 심지어 추운 겨울 남루한 옷차림을 한 거지에게 당신의 옷을 벗어주기까지 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수행이력
 
1891년 3월30일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서 부친 이인오(李仁五) 선생과 모친 밀양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창림(昌林)이고, 본관은 평창(平昌)이다. 후손들에 의하면 백담사 입구 주차장 근처인 용대2리 907번지라고 한다. 출가후 받은 법명이 춘성(春城)이고, 법호는 춘성(春性)이다.
 
만해스님 은사로 출가
 
불혹 이후 ‘참선’ 정진
 
오색구름을 탄 동자가 내려오는 태몽을 모친이 꾸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했다. 9세 되던 해에 모친을 따라 설악산 신흥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다 불상을 본 후 출가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 수년을 기다렸다 출가했다. 이때가 1903년으로 세속 나이 13세였다. 출가도량은 인제 백담사이고, 은사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었다.
 
<사진>춘성스님의 출가도량인 백담사 전경.
 
20세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경학(經學)에 전념했다. 안변 석왕사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1915년)했다. 이후 ‘화엄법사(華嚴法師)’로 명성을 세상에 알렸다. 30세(1920년)에는 설악산 신흥사 주지, 35세(1925년)에는 석왕사 주지 소임을 보았다. 하지만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1922년, 1924년, 1928년 ‘석왕사주지취직인가의건’ 서류에 춘성스님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석왕사 주지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님은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세상이 무상함을 탄식하고 모든 것을 놓았다. 즉시 덕숭산 만공(滿空)스님 회상에 들어가, 오직 화두 참구로 수행에 전념했다. 이때 만공스님을 법사로 건당(建幢)하여 춘성(春性)이란 법호를 받았다.
 
60세가 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지만, 북한산 망월사를 떠나지 않고 도량을 지켰다. 제방선원에서 두루 정진한 스님은 1960년 의정부 망월사 주지와 강화 보문사 주지 등의 소임을 보며 후학을 지도했다. 금오.금봉.고봉.전강.경봉.혜암.벽초 스님과 교분이 깊었다.
 
1977년 8월22일 오후 7시15분 원적에 들었다. 이때 스님의 세수 87세, 법납 74세였다. 영결식과 다비식은 서울 화계사에서 문도장(門徒葬)으로 엄수됐다. 스님의 유언에 따라 다비후 서해 바다에 뿌렸다.
 
스님의 비와 부도는 1981년 5월 성남 봉국사에 모셨으며, 비문은 탄허(呑虛)스님이 찬(撰)을 했다. 상좌로 총림(叢林).해월(海月).견진(見眞).설옹(雪翁).향산(香山).덕초(德草).장진(莊眞).무착(無着).해룡(海龍).무주(無住).성초(性草) 스님이 있다.
 
 
 
 
■ 춘성스님 어록
 
“극락이 마음을 떠나 따로 없고, 종교도 본래 없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때가 묻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불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다.”
 
“불법(佛法)은 들어가는 것도, 들어가지도 않는 법이다. 우리는 거의 모양과 형식으로 하는 중노릇이다. 중노릇이 모양으로 되어지는 법이 아니다. 그까짓 모양이 불법을 아는데 무슨 필요가 있는가. 모양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노릇 한다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풀잎으로 몸을 가리고 나물이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면서 그것이 중노릇 하는 것인 줄 알고 평생을 해보았자 신(信)이 없는 ‘모양 중노릇’은 그야말로 소무공덕이고 허송세월이다.”
 
 
 
 
■ 서옹스님의 영결 법어
 
1977년 8월24일 서울 화계사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 당시 종정 서옹스님 영결법어.
 
春城老師行履處(춘성노사행리처)
 
三世佛祖不得窺(삼세불조부득규)
 
七顚八倒此世中(칠전팔도차세중)
 
遷化向什處去(천화향십마처거)
 
漢城街頭現全身(한성가두현전신)
 
 
춘성노사 노니신 곳
 
삼세의 불조도 엿볼 수 없도다.
 
이 세상에 걸림 없이 한바탕 진탕치고
 
어디로 가시는고
 
서울 가두에 전신을 나투시도다
 
 
 
 
■ 춘성스님의 마지막 게송
 
滿月靑山無寸樹(만월청산무촌수)
 
懸崖撤手丈夫兒(현애철수장부아)
 
八十七年事(팔십칠년사)
 
七顚八倒起(칠전팔도기)
 
橫說與竪說(횡설여수설)
 
紅爐一點雪(홍로일점설)
 
 
만월 청산에 나무 한그루 없으니
 
절벽에서 손을 놓으니 대장부구나
 
팔십칠년의 일이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나
 
횡설수설 했으니
 
붉게 달아오른 화로의 한 조각 눈이구나.
 
 
[불교신문 2594호/ 1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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