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를 생명으로 삼고 놓치면 죽은 줄 알아야”

금강산 법기암에서 출가…내년 세수 90세
발우공양하며 하루 네번 수좌들과 ‘정진’

경주 흥륜사 혜해스님은 새해 아흔을 맞는다. 한 평생을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아끼고 하심하며 살고 있다. 스님은 “수행자는 공부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는 존재라며 공부만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당신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경주 흥륜사 혜해스님은 새해 아흔을 맞는다. 한 평생을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아끼고 하심하며 살고 있다. 스님은 “수행자는 공부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는 존재라며 공부만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당신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새해가 되면 아흔이다. 1921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해방 전 해인 1944년 24세에 금강산 법기암에서 출가해 남북이 휴전선으로 가로 막히자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월남했다. 28세 때 첫 총림인 해인사에서 효봉스님 회상에서 공부를 했으며,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내려와 향곡스님 회상에서 공부했다.

세월은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한국전쟁, 정화, 근대화, 쿠데타 민주화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출가 후 65년 동안 강산은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고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를 겪었지만 스님은 65년 전 그대로다. 오직 공부 공부 공부 뿐이며 부처님 가르침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실천하는 수행승이다.

경주 흥륜사 혜해스님 이야기다. 한국 비구니계 최고 어른이다. 겨울 추위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던 지난 15일은 삭발일이었다. 흥륜사 천경림 선원 수좌들도 동안거 결제 후 처음 맞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맏상좌 법념스님(흥륜사 한주), 법우스님(천수암 주지), 흥륜사 주지 일념스님, 삭발일을 맞아 모처럼 시간을 낸 천경림 선원 입승 법경스님이 노스님과 마주 앉아 공부와 스님의 수행일화를 들려주었다. 노스님의 일생과 생활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부처님 말씀 그대로’다. 상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말씀을 듣지 않아도 된다. 은사스님 하시는 그대로가 바로 상당법문이다.”

수행자가 지켜야할 기본 원칙에 대해 부처님께서 가르친 내용이 <사분율>에 담겨있다.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적게 먹고 아껴 쓰며 하심(下心)하라. 그리고 오직 공부하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실은 간단하다. 그리고 당당하다. 복잡한 말이 필요 없다. 눈빛만 보아도 안다고 하지 않는가.

반면 거짓은 복잡하다.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 상황을 설명해야하고 장황한 논리를 가져와야한다. 말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생활이 복잡하면 접촉이 많아지고 접촉이 많아지면 허점도 많아진다. 진실보다 거짓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 수행자는 생활을 아주 단순화 시킨다. 물건도 갖지 않고 사람도 만들지 않는다. 그것들은 중생살이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공부인에게는 방해물일 뿐이다.

혜해스님이 바로 그렇다. 스님은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있다. 그냥 절약 수준이 아니다. 율장에 나오는 분소의를 걸친 비구가 바로 스님이다. 누더기를 깁고 기워 더 이상 덧 댈 곳이 없을 때 까지 입는다. 상좌들이 하도 권유해서 일흔이 넘어 겨우 새 옷을 입기 시작했다. 수세식 화장실은 물을 많이 사용한다며 엄동설한 새벽에도 멀리 까지 가서 볼 일을 보고 온다. 해외여행을 가서는 남들이 쓴 휴지가 아깝다며 잔뜩 들고 와서 상좌들이 놀란 적이 있다.

그랬던 상좌들이 어느새 노스님을 본받아 한 두 번 쓴 휴지는 버리지 않고 주머니에 보관했다가 재활용한다. 한번은 속바지가 너무 헐어서 상좌스님이 고양이 이불로 삼았다. 버리면 은사스님에게 혼날 것을 알기 때문에 재활용 한다고 고양이 이불을 삼았는데 결국 혼이 나고 말았다. 스님은 다시 빨아 속바지로 삼았다. 상좌들도 스님을 닮아 지금도 휴지를 세 마디 이상 쓰지 않는다. 옆에서 듣고 있던 노스님이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먹는 것 입는 것 전체가 시주물이다. 농부들이 피 땀흘려 지은 곡식이며 길쌈을 해서 만든 옷이다. 우리는 그 시은(施恩)으로 사는데 어떻게 함부로 쓸 수 있는가. 지금 편하고 좋은 세상이 되어 모두 잘 먹고 잘 살아서 의례 그런가 보다 하는데 시주님들 덕택으로 산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수없이 강조했던 시은의 중함을 스님은 묵묵히 평생 실천하고 있다.

스님은 겸손하며 인욕보살로 불린다. 지금도 새로 들어온 어린 스님에게 말을 높이며 함께 인사한다. 평생을 당신 빨래를 남에게 맡겨 본적이 없다. 최근 들어 겨우 상좌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당신 빨래를 내놓는다.

이 모든 것은 그러나 공부의 연장선이다. 스님의 관심사는 오직 공부 뿐이다. 공부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수행에 매진하다 보니 몸져 눕는 일이 생겼다. 어느 보살이 링거를 사와서 주고 갔는데 한 병을 맞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빨리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이 앞섰던 스님은 어차피 내 몸에 들어갈 물건인데 피로 들어가나 위로 들어가나 매한가지 아닌가 하며 링거를 아예 병째로 마셔버렸다. 몸이 많이 약했다.

이 몸으로는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겠다 생각한 스님은 동화사에서 있을 때 구덩이를 파고 장작을 쌓아올려 자화장(自火葬) 까지 결심했다. 우연히 이를 발견한 도반이 향곡스님에게 고해 무위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향곡스님을 모시고 공부하던 묘관음사에서 일이다. 오랜시간 장좌불와 용맹정진하다 보니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몸은 약해졌지만 정신은 맑고 뚜렷해 몸이 허물어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느날 묘관음사 축대에 앉아 정진하다 앞으로 넘어져 정신을 잃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스님은 용맹정진이 터였다고 한다. 화두를 받은 이래 장좌불와, 37일, 100일 용맹정진, 묵언정진으로 탁마한지 20년 째가 되던 해 마침내 화두일념의 경지에 올랐다. 양산 내원사에서의 일이다. 효봉스님이 말했던, 아침에 일어나 화두를 들면 잘 때 까지 끊이지 않는 화두 일념의 경지에 든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목숨을 내어놓고 매진했다.

졸음을 참기 위해 혀를 깨문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좀체 인정하지 않던 비구스님들도 혜해스님의 정진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통도사 극락암에서 공부하는데 미동도 하지 않고 정진하자 스님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스님은 “화두 일념의 경지에 들어가면 너무 좋고 행복해서 이 세상 전부와 바꾸자고 해도 안할 정도다. 몸이 맑고 깨끗하며 안 먹어도 전혀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했다.

금강산에서 경산스님으로부터 ‘무자’ 화두를 받아 정진 한 이래 해인사 효봉스님, 묘관음사 향곡스님 등 당대 최고승 회상에서 공부한 스님은 30여 년전 경주로 왔다. 이차돈 성사가 순교한 자리를 찾아 그 뜻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선원을 개설해 공부하며 제자들을 제접하고 있다.

스님은 수행자가 공부하는 것이 유일한 본분사인데 새삼스러울 것 하나도 없다며 말했다. “수좌란 공부 말고는 할 것이 없는, 아무런 쓸 데가 없다. 그래서 쓸 모 없는 돌처럼 산다고 해서 수좌를 일러 무위돌이라고 한다.” 스님은 이어 “화두를 생명으로 삼고 화두를 놓치면 죽은 줄 알아야 한다”며 오직 공부에만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상좌 스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노스님은 지금도 아침 점심 저녁 예불을 빠트리지 않고 발우공양도 함께 한다. 하루 네 번 젊은 수좌들과 함께 정진한다. 큰방에서 정진하다가 노스님이 저 멀리서 오는 발걸음만 듣고도, 문 열고 들어오는 자취만 보고도, 공양하는 것만 보아도 감동과 환희심에 젖는다. 달리 말씀을 하지 않아도 당신 하시는 행 하나만으로 번뇌가 사라진다. 말씀이 필요 없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 얼마나 오래 계실지 모른다. 그래서 하루 하루 아니 한 시간이 정말 아깝고 귀하다. 노스님께서는 견성(見性)을 못했다며 겸손해 하시는데 우리 눈에는 생불(生佛)이시다.”

혜해(慧海)스님은…
1944년 금강산 법기암에서 출가해 손경산스님으로부터 ‘무자’ 화두를 받았다. 해방 후 북측에서 수행을 하기 힘들어지자 1946년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다. 법륜사를 거쳐 해인사 국일암, 동화사 내원암 부도암, 묘관음사, 통도사 극락선원 등 전국의 제방 선원을 찾아 효봉스님, 향곡스님, 경봉스님등을 모시고 정진했다. 1970년대 경주 흥륜사에 주석하며 천경림선원을 개원했다.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 당시 2년 가량 신계사에 머물며 복원불사와 더불어 기도 정진했다. 현재 흥륜사에 주석하며 납자들을 제접하고 있다.

경주=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사진=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585호/ 12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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